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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순교사 - 김병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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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부터 매주 월요일~금요일 매일 2시 30분(한국시간)에 방송되는 "한국교회 순교사"에서는 산정현 교회를 끝까지 지킨 "유계준 장로님"의 이야기에 이어 변산학교 설립자이신 “김병조 목사님”의 이야기가 방송 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배우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병조 목사…… 김병조 목사는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군 동주면에서 김경복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있음을 인정받아 6세 때부터 서당에서 공부하여 후에 사서삼경, 제자백가 등을 통달하고 20세에는 구성군 관서면에 서당을 열 었다. 25세때에는 구성군 방현면에 변산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기독교 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러던 그는 1909년 김관조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1911년 세례를 받았다. 후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913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1917년 졸업하여 그해 8월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평소 민족애가 남달랐던 그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비밀조직의 간부가 되어 국내 애국 인사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한 안동 교통 연락소를 만드는 일과 평북일원을 순행하며 각처에 만세를 격려하는 일을 담당 하였다. 그후 4월10일에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수립요원이 되었다. 그리고 상해 선인교회에 부임하였고, 인성학교를 운영하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장과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변이 일어났고 만주의 패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자 어차피 일제의 지배속에서 활동한다면 기왕 조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여 1933년 귀국을 한다. 그리고 해방전까지 평북 용천에 있는 동상, 북평, 신서교회를 담임하고 경신학교를 운영하였다. 김목사는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어 예배 인도시에도 강단 밑에서 형사가 지킬 정도였다. 그러다가 형사로부터 주의를 세번 받으면 설교를 중단시키고 끌려 내려와야 했다. 목사도 울고 교인도 울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김목사는 신사참배가 교단에서 결의되자 강단을 떠나 시골로 내려 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 후 해방이되자 국토는 분단되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고, 소련군 사령관이 평남에서는 조만식, 평북에서는 김병조를 부르라 하여 특사가 그를 찾아왔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장로를 만나 의논하고 조장로는 표면 에서 김목사는 지하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반공 광복단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1946년 12월 24일 체포되기에 이르러 당일 신의주 소련군 특무사령 부로 이송되었고, 1947년 2월 20일경 소련으로 유형되었다가 1950년 가을 순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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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BN 한국어방송
작성날짜
11/7/2005 9:25 AM
조회수
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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