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은 1902년 7월 9일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김영윤은 계성중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만세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일경은 칼과 총으로 무장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제압하려 했고 그로 인해 대구에서만 피살자가 112명에 달했다. 그는 일경을 피해 잠시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다. 숭실대학을 졸업 한 후, 그는 목포 정명여자중하교 교사가 되어 1932년까지 8년동안 근무한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안에서 외쳐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한 이 민족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도 될 것인가?’라는 외침이었다. 결국 그는 교직을 내려 놓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신사참배의 문제로 그는 투옥 되고 말았다. 1935년 출옥하자마자 안악읍교회 조사로사역했고, 1938년,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16년간 안악읍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당시 안악읍교회는 정일선 목사가 당회장으로 일해왔는데, 그는 신사참배문제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김영윤 목사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을까? 그도 완강히 반대하고 거부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16년이란 긴 시간을 담임목사로 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김영윤 목사가 연행되거나 투옥되었을 때면 교인들은 언제나 다른 목 회자를 청빙하지 않고 그가 풀려날 날을 기다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김목사도 무척 바빠졌다. 무너진 노회를 재건하기 위해 황해노회장으로 봉사하고, 교회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안악읍교회는 이때에 본당 160평, 성인 500~600명으로 성장했고 성전 아래층은 교육관으로 만들었다. 또한 청년부에서는 밴드부를 조직, 한달에 한번 정기연주회와 노방전도를 나갔다. 그런데 1946년 10월 공산당에 의해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창설되고 그에게 가입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의 확고부동한 신념에 점점 악질반동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주변의 목회자들은 하나, 둘 몰래 월남을 시작했으나 그는 결코 양무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주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전쟁이 길어지고 유엔군의 북진이 이뤄지자, 공산군은 수감된 반체제, 반공 인사들을 죽이기로 택한다. 구덩이에 몰아넣고 수류탄으로, 우물에 생매장으로, 도끼로 목을 베어 살육했다. 김영윤도 그런 지경을 당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외친 주의 종들과 함께 용당포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고 말았다.
일일드라마 '한국교회 순교사'는 눈물과 희생으로 씨앗을 뿌린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간증 드라마입니다. 한국교회 순교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회 한국시간으로 오전, 오후 2시 30분에 방송됩니다.
현재 김영윤 목사의 간증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기초를 다져주신 목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